(김소연) 마음사전
솔직함과 정직함
솔직한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과 미워한다는 말을 번복과 반복으로 발설한다.
반면, 정직한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을 정리하여,
사랑하지만 미워한다거나, 밉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줄 안다.
자기감정에만 충실할 때에는, 좋을 때에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싫을 때에 미워한다고 말해버리지만,
누군가를 배려하고 싶을 때에는, 사랑하되 미워한다거나 밉지만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즉, 솔직함은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정직함은 남을 배려하려는 것이다.
솔직함은 전부를 다 풀어 헤친다.
이율배반적인 것들과 대책 없는 것들과 막무가내인 것들까지 그냥 다 뱉어낸다.
솔직함은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는다.
반면, 정직함은 전부를 다 풀어 헤치지 않는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율배반적인 것들 중에서 일관성을 찾아 정리하고, 대책없는 것들의 대책을 궁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함은 한층 더 정리되어 있으나 고집스럽고 편집적이다.
정직함은 가리는 것이 있다. 의도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주겠다는 신념 아래에서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정직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더 믿게 되는 것은 정직함이지만,
진실로 더 믿게 되는 것은 솔직함이다.
또한 솔직한 행동은, 하는 사람은 편하고 대하는 사람은 불편할 때가 많다.
정직한 행동은, 하는 사람은 조금 불편해도 대하는 사람은 편하다.
나를 편하게 하려는 것이냐 남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냐에 따라 솔직함과 정직함은 쓰임새를 달리 한다.
그래서 솔직함은 탈제도적이지만, 정직함은 제도 안에 들어와 있게 된다.
그래서 ‘솔직한 공무원’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정직한 공무원’이라는 것은 의미 있게 쓰인다.
- 김소연, 『마음사전』, 200-201쪽.
*
"자신에겐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요즘 이 말이 자주 떠오르곤 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뭔가 계속 헷갈리는 게 있었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별로 솔직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걸 부정적인 것처럼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 이 글을 봤을 때,
내가 꼭 나쁜 것 만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고,
스스로가 미처 몰랐던 나를 이해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지 어떨는지 모르지만,
한국어의 "솔직하다"는 보통 좋은 의미로 쓰인다.
일본어에도 같은 한자로 "率直だ”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걸 (특히) 훈독으로 ”스나오(すなお)”라고 읽을 때는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만은 아닌 듯한 뉘앙스가 있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말해버린다는 듯한 느낌이다.
일본의 SUNAO라는 상품명의 아이스크림 광고가 그걸 잘 보여주는데,
회사원 여성이 미처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는 속마음을
여자 아이가 나타나서 대신 말하는 식이었다.
어쩌면 한국에서는 솔직함을, 일본에서는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는 대개 후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걸 변명거리로 삼아
솔직하지 않은 나의 모든 면을 그대로 내버려둬도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때때로 스스로에게든 다른 이에게든
솔직해져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이른 저녁의 텅빈 시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솔직하다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같은 말일까?
솔직해지는 것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둘 다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각각에 충실하려고 하면
두 가지가 완전히 맞물리지는 않는 부분이 있었다.
*
솔직하다는 말이 미처 품어내지 못하는 의미가
어쩌면 정직하다는 말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솔직함만을 추구하게 되면
그 순간의 감정의 상태만이 전부가 되서
나 자신만 보이는 맹목적인 상태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순도높은 기쁨이나 불안, 분노에 마구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직해진다는 건,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한걸음 물러나서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다.
"자기 일로 벅차서 미처 감사하는 것에 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점도
어린 날들의 특징이네요."
自分のことでいっぱいで感謝にまでは至ることができない、
というのも幼い日々の特徴ですね。(吉本ばなな、『おとなになるってどんなこと?』p.25)
자신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던,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것?"이라는 화두를 제시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에 이렇게 써있었다.
조금은 거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솔직함은 아이, 정직함은 어른이 지닌 성품인지도 모른다.
사실 어떠한 역할기대를 매개로 이뤄지는 사회적 관계는
소위말하는 어른으로서의 모습으로 행동하면 되고 그것만으로도 성립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쉽다.
하지만 '친밀'하기 때문에 이상화되기 쉬운 관계들은
친하고 가깝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상대가 단지 그 사람이기 때문에 이어가려고 하는 자세로
상대 안에 있는 아이와도 함께 관계를 맺어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찾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관계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역할기대가 확실하게 주어진 듯 하면서도 지극히 사적인 부모와 아이 사이다.
아이는, 어른이라고만 생각했던 부모에게도 아이의 모습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하고
부모는, 아이를 어른으로서 대하는 법을 알아야한다는 것에 난해함이 자리잡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파트너와의 관계 역시 그러해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자기 자신이 있는 그대로 행동하는 것의 간극이 뒤따른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건
상대의 어른이자 아이인 모습을 모두 받아들인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모든 행동을 다 용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다른 관계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아이로서의 자신까지 내보일 수 있으면서도,
억눌러온만큼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같이 돌보는.
그건 스스로 자기 안의 아이를 인지하고 돌보지 못하면 행하기 어렵고,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상대에게 기대하면 힘들어진다.
결국 이러한 관계들은 나와 나의 관계와 함께 간다.
*
다시 한 번, 솔직함과 정직함으로 돌아와본다.
나는 솔직하면서도 또한 정직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솔직함은 한 번에 한 가지씩밖에 취할 수 없는 모양이다.
내가 나에게 솔직해지고 마주한 감정은 분명 진실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인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나 자신에게도 정직해지고 싶다.
그러기위해서는, 인용한 글이 시사하듯이
하나하나의 감정의 동사들을 늘어놓고,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문장을 쓰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건 어느 것이 더 강하고 어느 것이 더 중한지
감정들의 우열을 가려내고 싶어서가 아니다.
객관을 빙자하여 감정들을 희석시키거나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가 나 자신을, 나의 주관을 저버리지 않고 싶어서.
나를 믿고 싶어서.
~2020.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