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보는 것과 읽는 것과 쓰는 것

believe.in.the.best 2019. 10. 12. 03:01

0.

아직 쓰지 못한 것들과
쓰다만 것들이 있다.
오늘은 금요일,
나를 돌보는 시간이었던가.

1.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충실히 따른
몸이 깨어난 건 오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으헉...오늘 도예 마지막 작품을 찾으러 가는 날인데

자전거로 5분도 채 안 걸리는 곳이지만
열두시까지 가겠노라고 허둥대다가
오랜만에(인 것일까) 발을 박았다.
복사뼈 옆에 패인 부분... 하나의 명사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지만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위인 것 같다.

부딪히고 푸르스름해진 건 오른발이었기에
다친 곳은 오른쪽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감싸기 위해 버텨낸 왼쪽 다리가 아팠다.
그런 종류의 상처는 머리가 이유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왠지 그런 아픔이 이 곳 저 곳에 많이 방치되있을 것만 같았다.

2.

주말에 굉장한 태풍이 온다고 그래서
슈퍼에 갔더니 컵라면 코너가 텅텅 비어있었다.
이 때까지 이런 정도의 광경은 본 적이 없어서 멍해졌다.

무서웠다,
바람에 창문이 깨져버릴 수 있을 정도라는 사실과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셔터(雨戸)를 내리고 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것
그러니까, 바깥 풍경과 하늘을 보지 못하고 혼자 지내야 하는 게.

이상하게도
나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식량을 구비하고 단수에 대비해 욕조에 물을 담아놓으며
이런 재해나 비상 사태에 대한 긴장감도 느꼈지만
나 혼자만 책임지면 된다는 게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돌봐야 할 사람이 많으면 힘들겠구나 싶어.
내 마음 속에 내가 아닌 사람이 셋 이상 들어차서 힘들었던 며칠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든 감상인 걸까.

3.

세미나에서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의 영화를 봤다.
일본 타이틀은 <큰 새와 작은 새 (大きな鳥と小さな鳥, Uccellacci e Uccellini)>(1966)

영화를 애증, 혹은 증애한다.
어순을 바꿔봐도 둘의 의미는 같다만
사랑과 미움, 마지막이 그 둘 중 무엇으로 끝맺어질 지 모르겠어서.
연구도 영화도 그렇다.
힘들고 피하고 싶은데, 바로 그럴 때
그것들의 또 다른 이면이 피난처가 되주기도 한다. 

오늘은 평소에 연구를 하면서 보는 종류의 감정과는 다른
무언가 힘든 현실에서 붕 떠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을 만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갔다.
그래, 내가 영화 연구를 하는 걸로 알고 있는 선생님들의 인식과
나의 행동거지의 불일치를 확인하긴 했지만
오늘의 이 난해한 영화는
그래도 나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4.
그런 웃음들을 찾고 있다.
어제는 종종 만나는 언니의 회사 사람들과 저녁을 같이 했다.
언니와 같은 과에 있던 한국 남성 후배분(35)이 있는데
그의 너무나 회사원 같지 않은 행동들에 대해 듣고
얼굴 근육이 아플 정도로 웃었다.
그는 이번 달 말 발령이 나서 뉴욕으로 간다.
덕분에 가끔씩 평소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하고 어울릴 수 있어서 좋았는데.
조심히 잘 다녀오시길, 마음으로 바랐다.

5.
자꾸 기웃거리고 맴돈다.

그런 반복의 시간을 그만두고 싶어졌다.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서성이고 있잖아.
내가 날 뒤에서 밀어서 퐁당 빠져버리게 해버리면 좋겠어.

진탕 보고 한껏 읽고 마냥 써내려가면
그러면 좀 겁이 덜 나려나,
나로서 사는 게 익숙해지고,
말할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