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020.03.29

believe.in.the.best 2020. 3. 31. 20:47

 

0.
3월의 대설경보

어제의 일기예보에 의하면
어제의 최고기온은 24도 최저기온은 9도
오늘의 최고기온은 9도 최저기온은 2도,
저녁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오늘까지 이어질 거라고 그랬다.

마치 장마에 오는 장대비처럼
혹은 우박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는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나서 잠이들었다.

그리고 오늘,
알람 소리 없는 일요일
자다가 눈을 떠서 커튼을 열어젖히니
함박눈이 쏟아져서 지붕과 지면위를 고르게 덮고
수북하게 쌓여가고 있다.

비가 온다고 하지 않았어?
다시 확인해본 오늘의 일기예보에는
어느새 우산이 아니라 눈사람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오늘의 최고기온은 8도 최저기온은 0도
현재기온은 1.8도

오늘의 날짜는, 3월 29일.

내가 굳이 숫자들을 나열해보는 건
이 숫자들의 조합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1.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나부끼는 눈의 향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코 경건한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어제 비가 오는 와중에 흩날리는 꽃잎을 볼 때도 그랬다.

이렇게 온순하게 다른 것에 눈길을 주지 않고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는 시간을 들여보아도
도무지 실감을 주지 않고 내앞에서 사라져버릴 것들을
그래도 그렇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기분을
어쩌면 가을보다 더 느끼게 하는 봄.

 

그러다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서 내려다보니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나는 그가 곧 우리집 초인종을 누를 거라는 걸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2.

너무나 알기 쉽다.
올림픽 연기 결정 이후 연일로 뒤따른
도지사의 긴급기자회견,
수상의 개정특별조치법 시행.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을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26일 목요일 밤, 슈퍼에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은 이미 요리가 된 음식 같은 걸 팔기 때문에
조리할 여력이 있을 때는 우선 2층의 식자재 코너부터 보기 시작하고,
내리면 바로 보이는 건 과일이 올려진 냉장코너.
어제도 본 코너를 쳐다보니, 전혀 다른 광경이 보였다.

사과가 없다.
원래 같았으면 저 코너는 불그스름해야하는데,

드문드문 남아 있어서 아래 깔린 스티로폼의 연두색이 드러나보였다.
사과가 이렇게 인기가 있었나?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돌리니,
다른 것들은 아예 다 없다.

이 상황은 대체 뭔가, 안을 돌면서 계속 이유를 생각했다.
채소도, 고기도 다 없어진 걸 보면서
보존이 가능한 식품인지 아닌지와도 상관없이 거의 모든 코너가 텅 비어있다는 것과
남은 건 초코렛 같은 과자류 정도라는 걸 알았다.


‘어제 도지사가 주말 외출 자숙 요청 회견을 한 건 봤어,
“감염 폭발”이라는 유치한 표현을 써서 어이가 없었긴한데
근데 이틀 못나간다쳐도 그것만 가지고 이럴리는 없잖아?
뭐가 더 있었던건가, 내가 놓친 말이 있나.’
그러다가 문득 수도 봉쇄 가능성에 대한 대답을 했던 걸 떠올렸다. 이건가.

 

3.
사는 게 마치 연습처럼 느껴진다.

현재의 상황과 대면하고 있지만

이러한 것들에 대처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이 아닌 다른 때를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현재의 사태는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으로 인해 일어났지만

그것에 대해 주시하고 구체적인 대응을 하기보다도

이전의 방사선과 관련된 일련의 경험들과 비교를 하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어날 것이 거의 확실한- 큰 지진에 대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재기 소동은 한 달쯤 전에도 있었다.

마스크와 비슷한 소재라서 화장실 휴지도 없어질지 모른다는 데마 때문에 휴지 사재기를 한다더라,
그 얘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런데 드럭스토어와 슈퍼에 가니 휴지가 정말로 사라져있었다.

 

이제 겨우 그것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식료품인가.

식자재같이 실생활과 직결되는 것들이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상황을 보며

이렇게 즉각적으로 생활에 직격탄을 날리는 정치가의 선동에 진절머리가 나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내 생활을 지키기 위해 나 또한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 소동에 휘말려서 나도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까지 포함해 넌더리를 내면서도,

내일은 더 귀찮은 상황이 되어있을 지도 모르겠다 싶어져서

아마존에서 어느 정도 보존이 가능한 식품을 주문했다.

 

며칠 전, 앞으로 지진 같은 재해가 올 지도 모르니

물을 부으면 먹을 수 있는 밥(アルファ米)이라던가

캔에 들어있는 비스킷 같은 5년동안 보존이 가능한 것들,

말 그대로 비상식을 주문한 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아무리 봐도 이런 것들을 꺼내먹을 정도는 아니고,

지금 한차례 사재기를 한 사람들이 쓸어간 것처럼

한 달도 못 갈 음식들까지 쌓아놓을 계제는 못된다.

지금 이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구 냉장고가 가장 큰 가 인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금방 유통기한이 지날 것들이 아니라 통조림이나 레토르트 식품같은 것들을 샀다.

인터넷 상에서도 사재기의 여파로 재고가 떨어진 것들이 있었지만

아마존 팬트리는 회원만 사용이 가능해서인지, 그래도 좀 나은 것 같았다.

꼭 안 사도 될 것 같은 몇몇은 박스의 남은 공간을 채우려고 카트에 넣었다.

계속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이것들을 바로 꺼내먹겠지만

지금 당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1-2년 정도 대비할 수 있는 것들을 산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4.

내가 생각한대로 금방 초인종이 울렸다.

대답을 하고 나가니 눈 때문에 점퍼가 젖은,

어제와 같은 분이 상자를 건네주셨다.

그래, 어제도 한 차례 주문한 것들을 배달해주기 위해 오셨던 분이다.

딱히 큰 의미 없이 "오전중 배달"에 체크를 했는데,

어제 오후 한 시가 되기 좀 전에 찾아오시고는

내가 문을 열자 "오전 중까지 못 와서 죄송해요"라고 하셨던 택배 기사분.

이 물류 이동이 많은 시기에, 온라인 사재기까지 가세해서 더 바쁘셨겠구나,

그것들이 오전에 오는 것조차도 잊고있었던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 날 아마존에서 추가로 온 메일을 보니

내가 주문한 후 미처 재고 확보를 못한 것들이 있다며

배송이 늦어질 것들은 뒤이어 보내겠다고 했다.

언제 먹을 지도 모를 피자 소스를 따로 보내주겠다는 내용에,

그렇게까지 할 거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취소는 하지 않고 내버려뒀다.

 

눈에 익은 얼굴과 상자의 크기를 보고
이거 때문에 또 오신거구나 싶었다.

안쓰러워져서 말을 건넸다.

"눈도 오는데... 운전하시기는 괜찮으세요?"

그러자 "운전보다도 너무 추워서..."라는 말이 돌아왔다.

맨손이시기에 나는 "장갑이라도 끼시고..."라 말했다.
그런 서로 말끝을 흐리는 대화를 했다.

더운 날이었으면 냉장고에서 뭐라도 꺼내서 드렸겠지만, 따뜻함은 차가움보다 시간을 요한다.
그냥 미안함만 가득한 얼굴로 보냈다.

 

5.

그렇게 눈이 내리는 날,

그가 나를 찾아오는 풍경이 만들어진다.

 

불필요하고 급하지 않은 외출을 자숙하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밤중에 긴급회견을 열어서 불필요한 발언을 하는 걸 먼저 자숙해야지,

나중에가서 사재기를 하면 오히려 혼란스러우니 협력을 바란다는 말 한마디만 덧붙이면 다인가?
사람이 모이지 않게 하려다가 이미 슈퍼에 밀집해서 계산대에 서있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되고,

애꿎게 눈오는 날에 바쁘게 돌아다니는 저분들이 감기라도 걸리거나 그 바이러스에 더 노출된다면 그건 무슨 형국인가.

 

불필요하고 급하지 않은 주문을 우선 관두리라,

상자보다도 더 작아서 한 손에 쥐어지는

한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꺼냈는데도 아직 차가운 피자소스를 멍청하게 쳐다보며

내 생활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다시금 솎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6.

그 날 저녁,
도쿄도민은 사이타마현에 사는 외할머니집에 가서
요며칠간 있었던 이야기를 식탁위에 늘어놨다.

외삼촌은 여기는 그래도 먹을 게 있다,

집에 가기 전에 슈퍼에서 뭐라도 사가면 어떠냐고 했다.

오늘은 식량확보를 위해 온 게 아냐,

나는 '이번에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그 와중에도 티비에서는 계속 신경에 거슬리는 보도들이 이어졌다.

 

3월 29일,

몇 주 전에 주말인 이 날에 가겠다고 했을 때는 몰랐지만, 오늘은 외할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외할머니 집에 가면 언제나 외할아버지 불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인사를 하지만,

어수선한 나머지 그마저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언니가 뒤이어서 온 후에야 부랴부랴 향을 피워 합장을 하고
마침 준비가 다 된 저녁을 먹으려고 바로 자리를 떴다.

 

오늘은 이런 이야기에 기력을 허비해버려도 그만인 날이 아냐,

돌아가기 전 현관 앞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진으로밖에 본 적 없는 당신의 얼굴 앞에 다시 섰다.
무언가 할 말을 찾다가, 언제나처럼 당신과 당신의 딸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것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Mykさんを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마치 남얘기를 하듯이

앞으로도 당신의 딸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정말이지 이상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