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020.04.18

believe.in.the.best 2020. 4. 18. 16:50

 

0.

높이 나무에 달려 있던 벚꽃 잎이

노란 너보다 아래로 내려와서 곁에 머무르다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너의 이름이 황매화라는 걸 E씨가 알려줘서 알았다.

그러고보니 너희들의 꽃잎은 약간 뾰족해서 비슷하게 생겼던 것 같다.
둘이 나란히 서있었다면 닮아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1.

월요일, 태풍이 오는 것 같이 휘몰아치는 비가

그칠 기색 없이 하루 종일 쏟아졌다.

오늘도 그랬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튤립같은 화사한 꽃들이 보여주는 색은 봄같고
해가 질 즈음 걸으면 바람은 아직 겨울같이 차다.
급작스럽게 불어닥치는 비는 마치 늦여름이라도 된 것 같이 군다.
더이상 날씨에 기대서 시간의 변화와 발맞춰 갈 수는 없게 되나 보다.


빗소리와 그런 생각이 마음을 휘저어서 피곤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요즘 정신을 차려보면 자꾸 (처음으로 해보는) 요리를 하고 있는 낯선 내가
달콤한 것들을 만들 때 쓰려고 산 럼주를 가지고 핫 버터드 럼을 만들어서 그런가.
맛을 보고 ‘달다, 아니 진하다’라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 도수가 ‘센’ 칵테일을 홀짝였다.

40도 짜리 럼주라는 것, 꽤 센 술이군...
평소에 술을 거의 안 마셔서 취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가물가물해지고,
몽롱해진 정신도 이것 때문이라고 해두고, 낮잠을 잤다.
일어나니, 하늘은 다시 새파래져있었다.

2.

날씨도 그렇지만,
시간의 기준을 정말로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으면 안 되나 보다.
학기 시작도 5월 골든위크 후로 연기되고,
자연만이 아니라 계속 변할 생각을 하지 않던 사회 전체의 시간도 변화를 맞이했다.
가게들은 아예 휴업을 하거나 저녁 시간 쯤에는 문을 닫는다.
굳이 문을 닫을 필요도 없는 가게들까지 쉬게된 것에 대해서는 계속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로 인해 여러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된 이들의 상황은 너무나 문제적이고 안타깝다.

그러한 와중에 전쟁이라는 단어까지 입에 올린 어느 나라의 수장도 있었듯이,
많은 이들이 종종 바이러스 자체가 나쁜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바이러스 때문인가?
발효와 부패라는 구분이 단지 인간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를 기준으로 붙여진 이름인 것처럼,
엉성하게 바이러스를 절대악으로 몰아붙인다 해도,
시기적절하게 지침을 정하지 못한 정부나 정치가, 

더불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사회 체제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바이러스가 특정한 대상을 선별해서 찾아오는 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은 공격이라기보다도 어떠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작용에 대한 반작용 혹은 대응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만든 사회에는 차별이 있고

그러한 수용체 속에서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나뉘고

보다 취약한 입장에 놓인 이들이 먼저 피해를 입게 된다.

물론 이건 의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며,

그러한 관계의 불균형이 모두에게 있어서도 해로운 것이라는 것이 극명하게 보여진다.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 더 무섭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도태된 사고를 극복해야 이 바이러스(와 관련된 사태)의 항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여러 관념이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세가 도전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3.
어제 일이 뭔가 거짓말 같네요.

 

화요일, 전날의 비바람이 그치고 날이 갠 날,
창밖의 햇살과 풀들을 보며 나는 E씨에게 그렇게 말했다.

학교 옆 아지트의 주인인 그녀와는 최근 한 달간 많은 얘기를 했다.
바이러스와 관련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정치에 대한 인식 또한 비슷해서,
그리고 가게에 손님이 거의 오지 않게 되서 오랜 시간 여러 대화를 했다.

원래 앞으로의 노년을 위해 올 해 안으로 가게를 정리할 거라고 말했던 그녀는
벚꽃이 필 무렵부터 손님이 급격히 줄고
학교 수업의 연기와 개강 이후의 온라인 수업 결정 소식을 듣고
가게를 한 달 후에 닫기로 했다.

 

정부의 지원금은 개인이 운영하는 이 작은 카페에는 별 해당 사항이 없는 듯했다.

"잘라내버릴 곳은 정해져 있어"

그 곳에서 같이 있던 누군가의 입에서 이 말이 들려왔다.

 

4.

지난 연말, E씨는 졸음을 참으면서 번역을 하고 있던 나에게

별로 힘든 티가 나지 않는다고 그랬다. 항상 똑같아 보인다고. 

그러면서,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한 JY선배는 바쁠 때 엄청 알기 쉽게 드러났는데,라고 했다.

선배와 내 이름은 가타카나 발음으로 하면 글자가 비슷해지는데,
그래서였는지, E씨는 가끔 선배와 내 이름을 섞어서 말하기도 하고

종종 나에게 선배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의 익숙한 모습을 떠올리고 같이 웃었다.

 

그래서였을까, 비바람이 몰아치던 월요일에 그녀와 통화를 하다가

JY선배에게도 가게를 닫는다는 소식을 전하셨는지 물어봤다.

 

내가 사는 곳 주변에서는 보이지 않는 살균 스프레이를 자기 집주변에서는 팔더라며

필요하면 사다주시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셨길래 전화를 걸었다.

전날 밤, 결국 가게를 닫는다는 메일을 받고 확인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도 무언가 할 말이 필요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 지 알 수 없었지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비바람 속에 밖에 있었다.

목소리가 주변 소리에 묻혔다. 도저히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 곧 다시 전화를 하겠다는 말을 한 것 같았다.

전화가 한 번 끊겼다.

 

이제 금방 다시 전화가 걸려올 것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만약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서 자가격리를 하게 되면 문앞에 카레를 만들어서 걸어놔줄테니 말하라고,

그런 얘기를 해주는, 내 생각보다도 더 나를 생각해주고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

내 마음이 편해지는 몇 안 되는 장소가, 생각보다 빨리 나를 떠나려한다.

 

밖에서 비는 휘몰아치고, 그 짧은 공백의 시간에 음악을 채워넣을 수도 없었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기다렸다.

빗물은 애꿎은 곳에서 샜다.

 
5.

벚꽃나무는 이미 연초록색으로 물들었고 
너도 이제 곧 자취를 감추려 한다.

다음에 무엇이 찾아올 지 이제 나는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지는 더 분명히 알 것 같다.

이럴 때 일수록, 여러 가지 좋은 발견과 변화들을 화분에 옮겨 심어야지,
그것들이 메말라버리지 않도록.

그리고, 지금까지 스스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의 의미를

불연듯 찾아온 아픔의 크기로 비로소 깨닫게 되더라도,

그 아픔은 내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마음을 할애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다.

 

어찌 되었건, 어찌 되든 간에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는 소중한 것들의 곁에 머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