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higaki Rin) 아이
아이 子供
아이.
너는 지금 작은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먼 거리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눈 앞 가까운 너의 존재,
하지만 어찌 이리 아득한 모습일까.
시아랴고 하는 걸
좀 더 다른 형태로 믿는 것이 가능했다면
작게 비치는 너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좀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머리는 뼈로 인해 단단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때문에 딱딱해지고 말았다.
아이.
너와 나의 사이에
어떠한 골이 있는지,
어떠한 불이 타오르려 하는지,
만약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무른 얼굴을 하고
이리 와 이리 와라고 말하는 때에
좀 더 나은 것을
너희를 위해서 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뻗치고 있는 나의 손이
길게 길게 어디까지고 뻗어서
끌어안는 이 슬픔의 묵직함.
*
또 이 날이 오고야 말았다,
그렇게 적겠구나 싶었다.
무엇을 하면서 보내면 좋을지
어쩌면 일 년 중 가장 막연해지는 날.
올 해는 이 시간을 어떻게 견딜까 하다가
그저 혼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면서 지내보기로 했다.
그렇다, 사실 가장 일상적인 일상을 보내면 그만인,
그게 가장 좋은 하루인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뒤따라왔다.
이때까지 어떠했는지 회상해보면
축하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터뜨리며 나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고,
반대로 내가 그들에게 쌓인 것들이 터져나오게 만드는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마 그것뿐만은 아니다.
내가 잊고 있을 뿐이지, 분명 누군가의 호의와 선물 또한 많이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의 내가 눈을 뜬 것도, 이모가 보내준 소포와 초인종 소리 덕분 아니었던가?
그러니 이 날은 가까운 사이에 있는 사람과 서로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인 파장이 함께 하는 날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간사함이라는 건
받은 것에 대해 순수한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받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여러 종류의 원망하는 마음에 기인하는 것이겠지.
어쩌면 그것이 살면서 느끼는 궁극적인 결핍의 원인이자 부조리일 것이다.
*
그녀의 생일까지 번역하고 싶은 시가 있었다.
시를 읽다가 왠지 그녀가 2월에 태어난 사람일 것 같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시가키 린, 시인은 나보다 일주일 빠른 2월 21일에 태어났다.
올 해는 그녀가 태어난 해로부터 100년째를 맞이한다.
100이라니, 기념해야만 할 것 같은 숫자 아닌가?
그러한 생각으로 먼저 번역하기 시작한 시는
<내 앞에 놓여있는 냄비와 솥과 타오르는 불과>였다.
그런데 단어 하나하나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웠다.
그래서 한 번 내 안의 마감 날짜로 정해두었던 2월 14일까지 끝마치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 달까지는 끝내보자고 생각했다.
시는 신기하다.
때를 맞춰서 내보낼 수 있었던 것들은
나중에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구절에 자리를 잡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의 상황을 그대로 품어준다.
그리고 생각하던 그때에 놓아주지 못했던 것들은
시간이 더해지고 난 후, 아직 그것의 때가 아니었던 거였구나 싶어 지면서 납득하게 된다.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혹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기에 날 떠나지 못했던 건가.
과거의 미래와 미래의 과거는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시간이 되었지만
정해두었던 기한을 의식했기 때문에
그때를 살면서 시의 언어와 마주하였고
전에 읽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번역을 하려고 시집을 펼쳐보았을 때,
이 시와 만났다. 그러고보니, 이전에는 제목을 보고 나서 읽지 않고 피했건만.
*
이것이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순서가 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맞는 순서라고 느끼고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다.
나를 이 세상에 살도록 만든 이들에게 받은 의문이 있다.
그로 인해 가지게 된 생각과 물음이
아이로서 당신들에게 향한 생각이
당신들의 시선에서 아이를 바라보며 이야기된다는 것을,
본디 당신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나로부터 역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나에게 말해주기를,
시를 읽으며 바란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을 배후에 두고서
당신들의 아픔을 뒤따라 (追体験) 하고
나의 아이를 바라본다고 하는 처연함을,
아직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대상과 어디서 어디로 이어지는 건지도 모를
어떠한 순환을 내다본 것일까.
그 망막함의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당신들에게 받은 질문들과 마주하기로 했다.
일 년 후의 오늘, 나는 다른 누군가의 필체가 아니라
내가 써내려가고 얻어낸 무언가를 나에게 줄 생각이다.
그때, 당신들이 나를 낳은 날-生まれ落ちた日-을
내가 태어난 날-生まれた日-이라고 바꿔 써보려 한다.
당신들과의 관계성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어떠한 자립을 내게 선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