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ry

(Kotani humi) 당신이 작은 상자를 열 때

believe.in.the.best 2019. 10. 23. 18:51

 

에필로그

 

당신이 작은 상자를 열 때
나는 먼 마을에 있고
잰걸음으로 교차로를 건너고 있다

하루하루 생긴 일들에서 떠오르는
희로애락에 떠밀려 가듯이
당신에게 작은 상자를 보낸 것일랑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당신이 작은 상자를 마당의 흙에 풀어놓으면
거기에 섞인 작은 씨앗이
이름 없는 보랏빛 꽃을 피우고

꽃에 열매가 맺히면
새가 열매를 쪼아 대려 온다

한참을 마당에서 놀고 하늘로 돌아가는 새
그 날개를 올려보고
당신은 숨을 한 번 내쉰다

그리고
위를 보면서 쉬는 한숨은
심호흡이 된다는 것을 안다

당신의 입술에서 생겨난
나비의 작은 날갯짓과도 같은 바람은
잠 못 드는 나의 마을에
밤의 빗구름을 데려온다

잠 못 드는 밤이 있는 건
누군가 나의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그 상자에는 지금
무엇이 들어있을까
문득 마음 속에 떠오를 듯했지만
언젠가 알게 되리라는 즐거움을 간직하고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하룻밤 계속 내린 달의 눈물이 마르고
샐쭉이 씩씩하게 질 즈음
아침해가 다음 계절을 데려온다

져버리는 벚꽃과 함께 떠나는 봄
짧은 생명들의 찰나의 여름
바라는 생활을 알게 되는 가을
이야기의 끝이 빛나는 겨울

계절의 틈에서
내가 잠들지 못하는 밤
당신은
나의 꿈을 꾼다

작은 상자에 대한 거라곤
떠올리지 않게 된다 해도
손 안으로
서로의 모습이 흘러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중에
가끔은 꿈속에서
잊었다가 떠올렸다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언젠가 다시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맞닿는 날까지

바람과 호흡을 맞추듯이
띄엄띄엄 반복한다

그 끝에 있는
어느 날의 해 질 녘
당신은 나를 만나러 온다

작은 상자의 밑에
잎을 지그시 눌러 남겨두었던
네잎클로버를 손에 들고

어째서인지
시시한 얘기만 하는 당신에게

나는
작은 상자와
그 안에 채워 넣은 것을 떠올리고
당신이 작은 상자를 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안다

당신이 작은 상자를 열 때
나는 나를 떠올린다

 

-小谷ふみ、『あなたが小箱をあけるとき』(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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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니 후미 (小谷ふみ, 1975.08.30-)

그녀의 시집을 처음 만난 여름날,
그때의 난 미처 몰랐지만 시인은 생일을 맞이했다.

시를 만날 기회는 징검돌이 놓이듯이
종종 내 앞에 주어졌지만
앞으로 내가 걸을 길을 먼저 얘기해준 시는
어쩌면 처음이었으므로

이 날의 우연한 만남은 마치 필연이었던 것처럼
그 후의 다른 인연들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와 같은 성과 이름을 가진 이들을 만난 것도 그러했다.
시를 만나기 전, 후미(코) (ふみ)는 내게 치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시를 만난 후, 고타니(小谷) 선생님은 내게 내리사랑을 알게 했다.
단어의 의미와 음성의 연결은 자의적이라고 하지만,
같은 이름으로 교차하는 당신들은 
나를 많이 울렸다.

시집은 네 글자로 이루어지는 모티브를
세 가지로 묶어내서 제시한다.
마치, 네잎클로버의 행운을
세잎클로버의 행복으로 엮어내듯이.
그 앞 뒤에 있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중에서,
나의 시작을 알려준 건 에필로그였기에,
몇 번이고 생각만 하다 관두고 말았던 시의 말들을
이제서야 옮겨본다.

이제껏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항상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이 답답했다.
하지만 그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 내 마음을 증명하기 위한
정성의 표시라고 한다면
이제는 이 또한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네 번째 잎은,
이 상자를 통해 행운을 돌려주고 싶었던 그에게 전했다.
8월에 글을 통해 만난 두 명의 그녀들과
9월에 재회를 하고 얼굴을 마주한 두 명의 그들이
지금 내 안에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