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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020.03.09

believe.in.the.best 2020. 3. 9. 18:38

 

0.

3월에 들어서고나서 일주일 가까이

피부가 화한 느낌이 나고 붉어졌다.

아마 방심을 하고 기본적으로 조심해야할 것들에 소홀했던 탓이다.

그것도 있고, 마스크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도 다소 영향을 미쳤다.

 

1.

일본으로 돌아오고 난 후,

내 생활공간이 참 아담한 영역 안에 한정되어있었다고 느꼈다.

한국에서는 누구를 만나려고 하면

일단 전철을 탄다거나 이동시간이 어느 정도 걸렸는데

여기서는 그냥 한 바퀴 일주하듯이 걸어다니면 생활이 이뤄진다.

도어 투 도어로 학교까지 도보로 10분이면 갈 수 있고

(그마저도 자전거를 탈 때도 있다)

종종 밥을 먹으러 가는 아지트들은 학교에 붙어있는 옆문들 근처이며,

역과 집과 학교를 이은 공간 안에서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종종 연구회같은 일정이나 약속이 있어서 도심에 가는 걸 빼면,

단조롭기 그지없다.

 

이 '한정됨'을 특별히 나쁜 것처럼 여기지는 않는다.

앞으로 상정하는 기간동안은 더 좋아질 것 같다.

바라건대 지겨워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그만큼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했다고 느끼기를 바란다.

 

2.

거의 매일 연구실을 오가는 생활에 마음이 편해지는 건,

이런 것들과 다른 것들의 영향을 받아서이기도 하다.

 

날씨가 좋아도 꽃가루가 비산하니 달갑지 않다,

라는 문장이

꽃가루가 많아도 어차피 연구실에 있으니 상관없다,

라는 식으로 전부 새롭게 쓰여지는 것이다.

 

교외지역의 대학 주변이란,

나무가 있고 보도도 널찍한데다가

학기가 시작되기 전이라 한산하다.

학교 구내는 말할 것도 없이 한적하다.

아직 신학기가 오기까지 한 달 정도는 남았는데

이 느낌이 좋아서 학기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연구실에는 출근하듯이 오는 선배 한 명이 있거나

아무도 없거나 거의 둘 중 하나인데

둘 다 좋고 둘 다 평온하다.

 

전철으로 출퇴근이나 통학을 하는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고 인구밀도가 높은 공간에 노출될 수 밖에 없으니

공기와 신체의 접촉에 대한 대응에 신경이 곤두설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외출을 자제한다고들 하던데

굳이 안전을 생각해서 그러한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나는 안정적인 곳에 있는 게 되버린 셈이다.

 

3.

애매하게 끼니를 때우고 나서

옮겨두고 싶은 책들이 있어서 우선 연구실에 들렀다.

애매하게 배가 고파서 아지트에서 작업을 할까 싶었는데,

막상 오고나니 간식을 사와서 여기서 해도 되겠다 싶어졌다.

 

얼마되지도 않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려고 키를 가지고 나섰지만

어제는 춥더니 오늘은 따뜻하다.

그래서 걷기로 했다.

그러다가, 5년은 오갔던 이 공원 같은 공간을 산책하듯 걸었던 적이,

심어져있는 나무들을 올려다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져서

물끄러미 나뭇가지를 우러러보았다.

 

4.

나만이 아닌 선생님들의 아지트이기도 하기에

어쩌면 이선생님이 계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U선생님이 카운터 자리에 앉아 계셨다.

 

大変な状況ですよね、大丈夫ですか?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나는 그게 무엇에 대해 한 말인지 모르겠어서

잠시 멈칫했는데

선생님의 염려하는 마음이 묻어난 얼굴을 보고

애매하게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5.

내가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역시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입장에서 물은 것이었는지

우선 서로 마스크가 있고 없고에 대한 말을 하다가,

한국에서 일본으로의 입국 규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부모님과는 이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냐고 물으시기에,

'최근에 엄마도 일본에 한 번 왔고, 나도 한국에 다녀와서
당장 왕래해야할 일이 없다보니 별 말 없었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다가

"특별히 하지는 않았고, 동생이 입국 규제 뉴스가 떴다고 말하기는 했어요"라고

무언가 시들한 대답을 했다.

그래도 서로 오갈 수 없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기사를 보고 당장 떠오른 건,

한국에 조사를 가야하는데 그 때까지 상황이 진척될 지 알 수 없는 곤혹스러움,

나도 출국을 하면 입국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한 난처함이었다만.

선생님은 초기에 중국에서 오는 이들의 입국을 막지 않은 것에 대한 정권 지지층의 비판을 의식해서

전문가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멋대로 정했을 게 뻔하다고 하셨다.

 

그래도 이제까지의 한일관계나 그로 인한 불매운동이 그래왔던 것처럼

이러한 조치도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상한 낙관주의일지, 사건 사고에 놀아나지 않는 것일지는

접시 저울에 올려진 정보에 따라 기울어지지만.

어찌되었건 바이러스에 대한 몸의 면역력만이 아니라

그에 대처하는 정신의 면역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회도, 나 자신도.

 

6.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

자전거를 타고 오는 R과 마주쳤다.

독일에서 온 유학생인 그도 마스크를 하고 있길래

꽃가루 알레르기냐고 물어봤다.

그렇단다. 이 증상이 지속되는 3개월 간의 시기가 싫어서

이제 일본을 떠날까 싶어진다고 그랬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꽤 오래 일본에 있었다.

 

연구실을 나서기 전, 그와 절친한 동기이며

꽃가루 알레르기는 생기지 않은 선배가 그랬다.

주사치료라는 것도 있다더라고.

근데 “한 몇 년만 더 있을 거면 그냥 참고,

이삼십년 있으면 방법이 달라지겠네”라고 했다.
나는 일단 지금은 이렇게 지내고
“장기적 비전이 생기면 그 때 다시 생각해볼게요”라며 웃었다.

결국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지내는 것이다.

7.

그러고보니

꽃가루 알레르기에 홍차가 좋다고 한다.

들은 적이 있는 얘기였는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무 일상적으로 마시고 있었기에,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정보였던 모양이다.
연구실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홍차의 찻잎을 티스푼으로 티백에 옮겨 담고,

잠시 이 곳을 떠나있을 때 끊겨있던 습관을 떠올린다.

예전처럼 매일 마셔보려 한다.

 
그리고,
따뜻한 차의 향을 맡으며 심호흡을 해본다.
나의 무게중심이 낮아지고

흩날리는 것들이 조금씩 가라앉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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