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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찰
자기가 사는 곳에는
자기가 표찰을 거는 게 제일이다.
자기가 몸을 뉘이는 장소에
타인이 걸어 주는 표찰은
언제나 쓸 만한 게 못 된다.
병원에 입원하니
병실 문패에는 이시가키 린 님이라고
님이 붙었다.
여관에 묵어도
방 바깥에 이름은 없지만
이윽고 화장로의 관에 들어가면
닫은 문짝 위로
이시가키 린 귀하라는 팻말이 걸리겠지
그때 내가 거부할 수 있는가?
님도
귀하도
붙어서는 안 된다,
내가 사는 곳에는
내 손으로 표찰을 거는 게 제일이다.
정신이 깃든 곳도
다른 사람이 표찰을 걸어서는 안 된다.
이시가키 린
그걸로 충분하다.
- 石垣りん、『石垣りん詩集』 (2010) -
이시가키 린 (石垣りん, 1920-2004)
일주일 전 표지에 이끌려 펼친 시집에서
옮겨적고 싶은 시를 만났다.
그런데 책에 실린 다른 시인들의 시를 훑어보다가
다시 돌아와 책장을 몇 번이고 넘겨봐도
분명히 방금 전 본 그 문장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번 놓아주고 난 후,
집에 와서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밤
탁자 위에 올려둔 책들 속에서
이제껏 펼쳐보지 않고 꽂아놓기만 했던 책에 자꾸 시선이 간다.
왠지 자꾸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고 넘기다가
마지막에 이시가키 린의 시를 발견했다.
<산다는 것>(「くらし」)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는 시의 원문을 찾아보고 싶어서
검색하다가 만나게 된 시 <표찰>.
그리고, 한 번 내 곁을 떠났던 시 또한
같은 시인이 쓴 것이었음을 발견한다.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그 날 하루 종일 내 안에서 울리던 소리가 머물고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건 내 안의 소리가 당신을 부른 걸까,
아니면 당신이 나를 부른 걸까.
탐정처럼 추궁해본 들 그 시작은 결국 알 수 없겠지.
그래도
'소레데 이이', 「それでよ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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