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9

당신의 표시

believe.in.the.best 2019. 11. 23. 01:18

 

0.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것들을 열심히 쫓아가서

모두 담아내려고 하기엔 나는 너무 미진하다.

그래서 오히려 비워내려고 하지 않으면

담아낼 수 없다.

 

1.

고타니 선생님을 만났다,

당신께도 적어서 보내드렸던 시가 담긴

시집을 발견했던 곳에서.

 

나는,

평소에는 거의 그러지 않으면서

최근에 있었던 기뻤던 우연에 대하여 재잘대고

평소에는 굳이 얘기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당신 앞에 늘어놓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냥 가만히 얼굴을 보면서

얼굴은 단지 풍경이 되고

그저 맑은 눈만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을 이제까지 살면서 몇 명이나 만났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신께서는 갑자기 내가 보내드렸던 시

당신의 표시(「あなたの印」)를

예쁘게 인쇄한 종이를 건네주시더니

"클로버를 찾아낼 확률은?"

이라 물으셨다.

 

갑자기 주어진 질문의 답을 찾으려

종이를 넘기며 찾아보다가

"당신이 당신을 찾아낼 필연의 확률...?"

이라 대답했다.

그러다가, 정답을 발견하고

"일만 분의 일!"

이라고 다시 답했다.

 

그러자,

백이십여 명이 있는 가운데에서 뽑기로 정해지는 자리에

연속으로 두 번 나란히 앉게 될 확률은

이것 보다도 더 낮다며 웃으셨다.

뽑기운이라고는 없는 내가 행한

두 번의 기회에 대하여.

 

2.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당신께서 이제까지 걸어오신 이력에 대한 글 속에서

바둑알 이야기가 적혀있던 걸 기억하고 여쭤봤다.

검은 돌을 99개, 흰 돌은 1개

100개의 바둑알을 넣어놓고

흰 돌을 두 번 뽑게 되기까지 몇 번을 시도해야하는지

열흘 동안 실험해 보았다는 이야기.

그 결과, 흰 돌을 연속으로 두 번 뽑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는 것.

말하자면, 평소 거의 일어나지 않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모두 연달아 찾아온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단지 개인적인 발견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 발견은

나는 알지 못했던 당신의 신념의 서사와

내가 겹쳐지는 부분을 알게 했다.

 

3.

내가 시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구절과는 다른 문장이지만

어쩌면 같은 기쁨을 이야기했고,

나는 시인에 대해 아직 덜 고마워한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선생님이 환승하시는 역까지 짧은 배웅을 하고

악수를 하고 헤어지면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은

손의 딱딱한 감촉 위에 내 손을 덧대어 보았다.

 

나는 나의 행복을

지금의 행복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집에 가는 길 밤하늘을 보며 되뇌었다.

 

4.

내가 하나하나의 세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러면서도 내가 느끼는 바가 틀린 것도 아니라고 믿고 있다.

 

선생님과 재회하였을 때의 확률은

우연히도 계산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각자가 걸어온 시간 속에서

그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모든 그것들이 지표가 되어주지 않았더라면 걷지 않았을 길 위에서

누군가와 만난다는

계산하지 못할 확률에 대해.

 

그리고, 한 번 찾아왔던 이들과의 인연이

뒤이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모든 걸 놔버리고 후련해지고 싶었지만

결코 그렇게는 흘러가지 않는 기묘한 흐름 안에서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아주 기뻐하는 것과 너무 슬퍼하는 것이

결국 마음을 다해 우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면

슬픔을 택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쁨은 내가 선택하고 싶다.

 

그런 다짐을 적어본다.

 

 

 

'2019'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모  (0) 2019.12.03
2019.12.01  (0) 2019.12.02
2019.11.19  (0) 2019.11.19
2019.11.16  (0) 2019.11.16
2019.11.14  (0) 2019.11.1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