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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본과 한국의 표준 시각은
실제로는 한 30분 정도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같다.
다만, 늦은 비행기로 이동한 후 자는 시간이 더 늦춰져서
시차 적응이라도 필요한 걸까.
계속 널브러져서 자고 싶었는데
오전에 동생이 깨워서 일어났다.
어제는 날씨가 따뜻하더니 오늘은 부쩍 추워지고,
앞으로 점점 기온이 더 떨어진다고 한다.
동생은 내가 일본에서 가져온 외투들을 보고 그걸론 택도 없다며,
자기가 롱패딩을 입기 시작하면서 방치해 뒀던 예전 패딩을 '발굴'해줬다.
이제 영하여도 밖에 나갈 수 있다.
1.
1월의 마지막 날,
일본에서 마무리짓고 오고 싶었지만
쓰던 도중에 정말이지 너무너무 쓰기 싫어서
한 단락 정도만 남겨뒀던 서류를 마저 쓰면
할 일이 끝나는 날.
식탁 앞에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앉아있다가
1월 안에 다 끝내버리고 2월부터는 쉬면 되겠다며 좋아하자,
동생은 2월에 네 놈(이라고 하진 않았다) 생일이 있어서 의미 부여를 하는 거냐고 했고 (아니요...1)
올 해 2월은 29일까지 있어서 그러는 거냐고도 했다 (아니요...2)
어쨌든, 느기적거리면서 학위논문집필상황보고서를 써서 냈다.
A4 한 장 분량이니 대충 적어도 되지만
내가 일 년 간 뭘 했는 지 돌아볼 겸 예전에 냈던 서류도 훑어 보고,
이것들이 박사 논문과 관련이 있다는 그럴 듯한 작문을 했다.
그러다가, 논문 투고 때문에 분투했으면서도 발표만 했다고 적은 걸 뒤늦게 발견하고
나란 놈의 기억력에 말을 잃었다.
전에는 형편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경이로울 지경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방되었다.
이제 뭘 하면 좋을까,
오기 전에 적어둔 메모에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들도,
오랜만에 만나볼까 싶어진 이들의 이름도 써있지만.
나를 내동댕이치지 않고
무언가를 위해 내던지지도 않고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둘까 싶어졌다.
2.
시간과 장소,
어느 것을 더 우선시하면 좋을까.
한국에 오면 왠지 이 곳에 있을 때 해야만 할 것 같은 것들에 나를 맞추고는 했다.
일본에 유학을 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에는
방학 때 들어와서 여러 사람들을 계속 만나러 다녔다.
그러다가, 쉬는 게 아니라 계속 빨빨거리고 있었구나 싶어서
항상 만나는 몇몇 이들에게만 연락을 하게 됐다.
이건 꼭 나만 그런 건 아닌 모양으로,
언젠가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의 남편 분이 해외 발령을 가신 후,
귀국하면 처음에는 이리 저리 누구 만나러 다니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런 것도 수그러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 시기도 지나고나서는, 학술대회라는 것에 참가한다는 목적이 생기고
조금 쉬어도 되련만 짧게 왕래를 했다.
앞으로는 논문을 써야하니 이판사판이라서
자료를 찾거나 조사를 하러 더 왔다갔다 거릴 것도 같다.
명목은 그렇다만,
어쩌면 그런식으로 좀 더 편하게 이동을 반복하면
장소를 기준으로 맞춰져 있던 내 시간을
좀 더 그 때의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소중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3.
어쩌면 나의 많은 것들은 장소에 의거해왔다.
연구도 그렇고, 언어 또한 그렇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이뤄지는 여러 대화들을 보고
그 장소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궁리하는 것.
그리고, 일본에서 지내면서 한국어를 잊어버릴 것 같다고 불안해하지만,
반대로 한국에 계속 있는다면 일본어를 잊어버릴까봐 걱정하겠구나 싶은 의식.
언어란 건 신기해서,
주로 말하고 쓰는 언어의 영역은 한정되있는 건가 싶어진다.
헐거워진 나사를 조이듯 한국어로 글을 쓰는 데 주력하면,
그만큼 일본어 나사가 느슨해지는 것 같달까.
단순히 덧셈을 하듯이 할 수 있는 언어가 늘어나면 좋을텐데
읽고 듣는 영역이라면 좀 더 유지가 되겠지만
내가 스스로 구사해야하는 것들은 그렇지 않다.
같은 정도로 쓸 수 있게 하려면,
두 발 자전거의 타이어가 하나라도 바람이 빠지면 움직이지 않듯이
둘 다 계속 연마해야 하는 모양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내 언어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
두 장소를 오가는 것이겠거니 했다.
4.
요즘에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라고 받아들여야하는 부분에 대해 인식한다.
최근에 알게된 것 중 하나는, 내가 색을 좋아한다는 것.
마음에 드는 색감이나 채도의 색이 늘어서있으면 그걸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도 심심하지 않다거나.
겨울 옷이 거의 무채색에 가까웠던 시기에는,
뭔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기분이 다운되더라는 걸 발견했다.
이건 그러려고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바꾸려고 노력해도 변하지 않을 나의 성향이며,
굳이 억누르려고 하면 나 자신이 부자연스러워지고 힘들어지니,
그대로 받아들일 영역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결국 나에게 있어서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하는 일-생계를 위한 것 뿐만이 아니라, 사회와의 접점으로서 내가 타인에게 환원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이걸 통해서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논문을 쓰는 학술적인 영역에서도,
그와는 또 다른 영역에서도,
나는 누군가에게 언어를 되찾아주고 싶은 게 아닐까 싶어졌다.
여기서 언어란, 언어학에서 말하는 단어나 문법과 같은 것으로 구성되는 체계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되찾아준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이러한 언어,
즉 대화의 가능성을 얻지 못하게 된 맥락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에 기인한다.
나에게 있어서 기쁜 것이 상대에게도 기쁜 것이 될 때,
순도 높은 행복을 느낀다.
내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이들과, 이것을 통해 함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내가 지향하는 것을 알게 한다.
하지만 그걸 이루기 위한 방법을 택하는 것은
나의 성향과 지향 사이 어디에 놓여있는 걸까.
5.
얼마 전, 언니와 대화를 하다가 나온 얘기였다.
언니는 내가 타협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게 의외였다.
나이 터울이 있는 언니는,
먼저 일본에 유학을 가겠노라고 정한 것을 비롯해 무언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피력해왔고,
엄마는 동생들도 있다거나 하는 등의 말을 하면서 이에 난색을 표했다.
난 그걸 보고 두 가지 입장이 다 이해가 가서,
말로 꺼내기 전에 내 진로를 '알아서' 타협해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나의 허용 범위 안에서 고른 것들이었지만)
그런데 언니가 하는 말에 의하면
네가 어떤 선택에 이르른 경위는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뭔가 하기로 정하면 그걸 끝까지 밀고 가고,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걸 피하지 않고
곧이듣고 대응하는 게 그렇게 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난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려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6.
하지만 지금 나는 타협이라는 단어에 이르러서 주저한다.
이제까지 나는 '알아서' 하는 것으로써 그 의미를 행해왔다.
하지만 이 단어는 양보하고 협의할 상대를 필요로 한다.
이전의 내가 적었던
"이것을 택하지 않는다는 선택이 더 괴롭기 때문에" 손을 내미는 것과
"이렇게 하기를 바라고 원하기 때문에 붙잡는 것" 사이에서,
무리하게 놓아버리면 나 자신이 견뎌낼 수 없을 성향과 관련된 것과
의미를 좇으려고 하는 지향에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
어쩌면 나는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우선 나를 "고통으로부터 구해내"야 하는데,
또다시 '알아서' 완결시키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혼자서 모두 정하려고 하는 태도,
그것은 어쩌면 굉장히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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