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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촛불들의 밤

believe.in.the.best 2020. 9. 20. 18:04

 

 

 

 

 

 

 

*

올 해 박사논문을 10월 말까지 내기로 시간을 정했기 때문이다.

이 구간 안에서 움직일 수 밖에 없었기에,

여기에 맞춰서 나의 선택과 행동을 맞추고 조정해왔다.

다만 주변 환경들을 논문을 쓰기 위해서 정돈하면서도

무언가 제대로 뛰어들지 못하는 느낌에 뒤숭숭했다.

한 달 남짓 남겨둔 지금까지 정말로 쓰겠다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각오가 안 된걸까,하고 박사과정을 마친 동기에게 물어보니

각오라기보다도, 10월이 되면 스위치가 켜질 거라는 말이 돌아왔다.

 

이 지경, 아니 경지에 이르면

평소에는 떨쳐버리지 못하고 계속 지니고 있던 불필요한 것들,

안 좋은 습관 같은 것들을 놔버릴 수 있게 된다.

석사논문을 쓸 때 한 번 그런 상황을 겪었는데,

안 그러면 끝까지 갈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움켜쥔 것들을 놓아주게 되었다.

 

뒤돌아보니, 이제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연구를 하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던 

그 타성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던 게 박사과정을 괴롭게 했던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리고 감당해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면서

내 안의 좀 더 본질적인 부분까지 되짚어봐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또다시

나라는 인간의 고질적인 사고와 행동의 버릇을 극복할 수 있는

굉장한 기회와 마주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 )

굉장한, 외롭고 괴롭고 좋은 일이다.

그렇게 회상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그 때가 아니다.

 

*

3년 전 프라하에서 사온 엽서를 방 문에 붙여놓았었다.

알폰스 무하 박물관에 갔을 때 본 그림이었다.

왠지 이 그림을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연구를 할 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어떤 실마리가 보이는 듯할 때가

가끔씩, 일 년의 한 번 정도, 혹은 어떠한 형태로서 마무리할 때 보이는데

혼자서 어둡고 추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빛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을 가지고

그걸 발견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 《별과 시베리아》라고도 불리우는 이러한 이미지여야 했을까.

 

지금은 연구실 칸막이에 붙여놓은 이 그림을 쳐다보면서

이제 무언가 다른 이미지로 바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밝은, 나은 것으로.

 

*

촛불의 밤(ろくそくの夜),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지트인 카페가 정기 휴일인 목요일에 촛불을 켜고 영업하는 날.
처음으로 들어가본 어둑한 조명속에서

새로이 맞이하게 될 이미지는 어쩌면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석사논문을 쓰고 "학술学術"이라고 쓰여있는 학위를 받았다.

학을 이제까지의 흐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

술을 예술성과도 같은 독자성이라고 이해한다면.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하는 것,

주관적인 그것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체 중에서 어느 위치에 서있는지를 제시하는 것.

 

그러니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것

 

그걸 위한 과정인걸까.

여러 모양의 촛대가 밝히는 촛불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내 안에 박혀있던 '혼자서'라는 것과 다시 마주했다.

혼자서 하지 않아도 되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거였단걸

그리고 혼자서 해온 것이 아니었다는 걸 비로소 알게되었다면

이제는 정말로 함께 할 수 있게 될거야.

 

*
대학원에 들어왔던 해의 가을 무렵
가게의 경영에 대한 이야기지만 연구에 대해서도 많이 돌아보게 해주었던,
"천천히 서두르라"던 점장님의 책을 만났다.
역시나 내 안의 때가 되어야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거라서
눈앞에 계속 있어도 멀찌감치 바라만 보던 속편(사독판)을 지금에서야 읽어봤다.
여러 말들이 와닿았다.

논문은 목표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걸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미래를 위해서 지금을 수단화하고 싶지 않다.
한 가지에 올인하면서 그 외의 모든 것들이 희생되는 게 싫다.

다만 살면서 한 번 정도는,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밀고가야하는 것이 있다.

그러한 시간을 선택해야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 때인 것 같다.

 

이선생님은 논문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거라고 하셨지.

어떤 영감이 주어졌을 때 써지는 것이 아니라

몸이 마주하고 앉아서 쓰는 육체적 노동이라고.

내 안에서 휘몰아치는 시간과 감정을

몸의 무게로 깔고 앉는다.

 

결과물이 기준이 되는 게 아니라,

지면을 밟고 나아가서 그곳까지 다다르는 시간을 잘 견뎌낼 수 있기를.
해봐야 아는 거라고 해도, 믿어보는 것이다.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2020.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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